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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짝 뒷걸음으로여행/2024 겨울비 당진과 예산 2024. 1. 29. 12:34
주말 이틀 내내 출근을 하는 바람에 매우 피곤한 하루였던 것 같다. 또 그 짬을 내어 여행갈 생각을 하다니, 어떤 식으로든 쉼표를 제대로 찍고 싶었던 모양이다. 추사고택에 이어 내가 향한 곳은 백설농부라는 한 카페였다. 같은 예산이지만 다시 삽교천을 건너는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카페에 도착한 뒤 나는 일에서 오는 피곤함을 누르고 카페에 앉아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요새 눈을 떼기 어려운 책이다. 이 카페를 찾은 이유는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단순한 바람 때문이었다. 나무로 지은 카페 일대에는 텃밭이며, 정원이며, 농원이 가꿔져 있지만 엄혹한 계절인지라 싱그러운 풀빛은 찾아보기 어렵다. 메말라가는 몇 가닥 억새들이 초라하게 부대낄 뿐, 멀리 바라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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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추사고택(秋史古宅)여행/2024 겨울비 당진과 예산 2024. 1. 28. 14:38
신리성지를 나설 때쯤에는 좀전보다 비가 더 내리기 시작했다. 훈풍이 가신 차 안에서 시동을 걸고 잠시 몸을 녹인다. 그리고 구글맵에서 찾아두었던 추사고택의 위치를 다시 확인한다. 11분, 그 시간의 차이에 의해 나는 당진에서 예산으로 월경(越境)하게 된다. 겨울철 입장마감 시간이 5시인 추사고택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가 좀 안 되었을 때로, 추사의 생애가 소개된 추사기념관까지 들를 생각은 못하고 고택과 묘소 일대만 거닐어보기로 했다. 필름카메라에 낀 희뿌연 성에를 외투 소매 끄트머리로 닦아내고, 가능하면 부슬비를 피해 처마를 따라 빈집에 잠입한 고양이처럼 고택을 살펴본다. 그리고 지난 여름 다산초당을 찾았던 때를 기억한다. 대나무가 자라나는 산길로 이어진 다산초당과 달리, 추사고택은 야트막한 솔숲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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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갯짓과 울부짖음여행/2024 겨울비 당진과 예산 2024. 1. 25. 18:21
당진에는 아마 지금쯤 많은 눈이 내렸을 것이다. 삽교천과 안성천이 커다란 하구를 만들며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이 일대는 예로부터 넓게 일컬어 내포(內浦)라고 불렸다. 지금의 예산, 아산, 서산, 홍성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그러므로 오늘날 홍성 지역에 만들어진 내포 신도시라 함은 상당히 좁은 의미를 띤다 하겠다. 여하간 두 물줄기가 만나는 아산만은 경기도와 충청도를 구분짓는 지리적 경계인 동시에 문화적 경계이기도 하기에, 당진 부둣가를 활발히 메운 공업단지를 뺀다면 이미 서해대교를 지나는 순간부터 상당히 전원적인 풍경이 차창을 가득 채운다. 그 풍경에 하나의 이채로운 색깔을 덧입히는 것이, 이 지역에 스며든 카톨릭교회의 정취다. 당진은 한국사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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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낙엽을 타고(Kuolleet lehdet)일상/film 2024. 1. 21. 07:15
pannussa homeinen kahvi ja lattialla astiat sade huuhtoo ikkunoita eipä tarvitse niitä itse pestä ei mikään enää lähtemästä estä mut oon kuin betoniin valettu polviin saakka selässä näkymätön tuhatkiIoinen taakka vaik edessä ois enää yksi rasti en tiedä jaksanko hautaan asti olen vankina täällä ikuisesti myös hautausmaata kiertävät aidat kun päättyisi viimein maallinen pesti mut syvempään kui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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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혁명(The long revolution)일상/book 2024. 1. 20. 10:17
우리 시대로 가까이 올수록 두 가지 점이 널리 강조되어왔다. 단순한 종류의 유물론에 대한 믿음이 증대하면서 대개는 초자연적 현실을 부정하는 경향이 수반되었고, 이에 따라 예술을 ‘현실의 반영’(모방), 혹은 좀더 세심하게 말하면 ‘현실의 조직’으로 볼 여지도 생겨났다. 반면에 프로이트와 융을 비롯한 새로운 심리학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현실이 있다는 주장을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되풀이해왔다. 인간은 통상적 방법으로는 여기 도달할 수 없는데, 여기가 새로운 과학과 예술의 입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p. 37 커뮤니케이션은 독특한 경험을 공동의 경험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무엇보다도 삶의 권리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살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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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산행주제 있는 글/山 2024. 1. 15. 11:06
작년 여름 즈음부터 참여했던 모임이 있다. 꾸준히 운동을 하던 곳에서 추가적으로 운동하는 소모임이 결성된 것. 사교적인 모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나름 큰 결심이었고, 아직까지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하루는 새해를 맞아 이 모임에서 등산을 하기로 했다. 도봉산을 오르기로 한 것. 여덟 시 반 도봉산역 1번 출구에 집합, 탐방로 앞까지 주욱 이어진 가판대를 지나 도봉산에 접어들었다. 도봉산은 초등학교 때 오르고 처음인데, 당시 만만치 않았던 산인 것만큼은 꼭 기억하고 있다. 어린 눈에 보기에도 까마득한 절벽이 많은 곳이었으니까. 11월 단풍구경차 찾았던 내장산보다는 낮은 산이고 최근에 등산을 다녀왔기 때문에 산을 오르는 데 크게 힘이 들지는 않았지만, 겨울산은 미끄러워서 내려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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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곳에 서서여행/2024 함박눈 공주 2024. 1. 12. 13:26
이번 공주 여행에서 가장 와보고 싶었던 곳은 사실 외진 곳에 자리잡은 한 카페였다. 나는 지도를 보고 빨리 정보를 파악하는 편인데, 이 카페라면 딱 내가 좋아할 만한 곳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비가 숨어살며 복을 누린다'는 카페이름의 숨은뜻까지도 마음에 든다. 가끔은 마음에 드는 카페 한 곳을 가보고 싶다는 그런 미친 생각으로 먼 길을 떠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이 대체로 불가해하듯이.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산자락에 위치한 이곳 카페는 차량을 이용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카페 맞은 편 작은 절벽에는 저녁에 가까워진 햇살이 헐벗은 나뭇가지에 찌를 듯이 내리꽂힌다. 늘 시원한 음료를 찾는 나는, 조금 전까지의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실내에 들어서자 이내 자동적으로 차가운 음료를 주문했다. 짧은 시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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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금강을 따라여행/2024 함박눈 공주 2024. 1. 11. 19:48
공주는 작년 여름 수해를 크게 입은 지역 중 하나다. 수해는 유적지도 빗겨가지 않아서 공산성 역시 물에 잠기는 불상사를 피하지 못했다. 다행히 무령왕릉 매표소에서 확인해보니 공산성도 둘러볼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해서 무령왕릉 다음으로는 공산성을 가보기로 했다. 성(城)의 서문이자 정문인 금서루에 도착하자, 가파른 비탈 아래로 마흔세 개에 달하는 공적비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입구에서 회전교차로 쪽을 바라보면 가운데에는 무령왕의 거대한 동상이 있고, 그 뒤로는 무령왕릉을 닮은 아치형 관문이 서 있다. 원래는 공산정을 출발점으로 시계 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걸으려 했지만, 공사구간이 있어 반시계 방향으로 성벽을 걸었다. 부소산성과는 다른 걷는 재미가 있고, 방위체계에 따라 성의 동쪽에는 청룡 깃발이, 서쪽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