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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鐵原): 백마고지로부터주제 없는 글/印 2023. 4. 29. 12:20
철원은 멀지 않았다. 나는 최근 우연한 기회에 DMZ에 걸쳐 있는 열 개 지자체에서 DMZ 투어가 열리는 것을 보고, 가장 적당한 곳을 고르다가 집에서 가장 가기에 편리한 철원을 택했다. 철원 코스는 백마고지뿐만아니라 전사자 유해발굴이 이뤄지고 있는 화살고지도 둘러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간 시점에는 작년 여름 수해로 인해 화살고지를 잇는 비마교가 유실되면서 화살고지까지 둘러볼 수는 없었다. 도착해서 가장 먼저 둘러보는 곳은 백마고지 전적지다. 전쟁 당시 이곳에서는 10일간 12번의 쟁탈전이 벌어져 7번 주인이 바뀌었고, 국군과 미군, 프랑스군이 참전했다. 전적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물론 수많은 태극기가 수놓은 오르막길과 그 끝에 우뚝 선 거대한 태극기다. 합장(合掌)한 형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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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위치와 바나나주스주제 없는 글/Miscellaneous 2023. 4. 26. 03:03
지금 일하는 곳의 장점은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을 부담 없이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광화문의 서점이라든가 신촌의 단골 샌드위치 가게라든가, 좋아하는 라면집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가까이에 있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 꽤 오랫동안 일을 했던 나로서는 이런 환경이 감사할 따름이다. 하루는 아무 점심 약속이 없던 날 신촌의 샌드위치 가게를 찾았다. 나를 알아본 아주머니는 반갑게 인사한다. 일은 할 만한지, 요즘 장사는 어떤지 등등을 이야기하신다. 나는 샌드위치 하나와 아몬드가 가미된 바나나주스를 하나 주문했다. 지난번 왔을 때보다 손님이 늘어서 코로나라는 긴 터널을 지나오신 아주머니의 얼굴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같은 날 샛강을 건너 여의도로 향하는 길에 당산 방면으로 넘어가는 석양은 한여름 오렌지빛을 발한다.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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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여의도, 신림주제 없는 글/印 2023. 4. 25. 19:22
# 필름 카메라를 집어든 동기는 뚜렷하지 않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인터넷으로 필름 카메라를 찾아보던 중, 30년도 훌쩍 넘은 아버지의 니콘 카메라가 떠올랐다. 나는 보는 즉시 그 카메라가 마음에 들었고, 필름 두 개를 주문했다. 필름 하나에 이만 원 돈이라니 필름 카메라를 쓰던 시절 삼천 원이면 충분히 필름을 구하던 때와 비교하면 비현실적인 가격이다. 하지만 나는 카메라를 찍는 동안 이 카메라가 더 좋아졌는데, 셔터스피드와 조리개, 줌을 하나하나 조절하고 필름을 아껴가며 사진을 남기는 맛이 있었다. 최고와 최대만을 눈여겨보며 숨가쁘게 살아온 내가 다른 호흡 방법을 찾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나는 36장 필름에 파주와 여의도, 신림에서 사진을 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살아남은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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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Passion simple)일상/book 2023. 4. 22. 10:52
나는 이 관능적인 소설이 말하는 “단순한 열정”은 "기다림(Attente)"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이 "기다림"에 두 가지 행위를 빗댄다. 첫 번째는 소설 속 화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며 경험하는 "기다림"이고, 두 번째는 글을 쓰며 소환되거나 소거되는 감각으로써 "기다림"이다. 어느 행위이든간에 소설 속 "기다림"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기다림은 실체다. 몸에 각인된 것이고 뇌리에 뿌리박힌 것이다. 작가에게 그 남자를 기다리는 것은 멈출 수 없는 것,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도 멈추는 법을 모르겠다고. («Je ne sais pas si je m’arrêterais.»—p.18) 마치 고삐 풀린 것처럼 그녀는 그 남자에 대한 기다림을 멈추지 못하고, 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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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일상/book 2023. 4. 13. 22:58
《소피의 세계》 이후로 철학 안내서를 읽은지 정말 오랜만이다. 그마저도 개별 철학서들은 더 읽지 않으니 철학 관련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다. 사실 엑기스를 뽑아 놓은 이런 류의 책들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 서가에 한동안 머무를 때에도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다가, 작년 연말쯤에서야 책을 샀다. 《소피의 세계》가 어린이의 시선에서 알기 쉽게 철학을 안내한다면,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현대를 살아가는 어른의 시선에서 이해하기 쉽게 철학으로 안내한다. 맥시멀리스트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우리가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거리를 던진다. 책에 소개되는 철학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여러 지역 여러 시대의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시몬 베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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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반란주제 있는 글/<Portada> 2023. 4. 12. 22:53
최근 C와 프랑스와 한국의 뉴스를 공유하다가, 프랑스에서 이른바 '땅의 반란(Les soulèvement de la terre)'이라는 활동이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대형 저수지(mégabassine)의 철거를 요구하는 한 시위 영상을 내게 보여주었는데, 장면 속에서 경찰과 시위대간에 물리적 충돌이 빚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대형 저수지라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공유지로써의 저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농가에서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사설 저수지를 말한다. 문제는 이 사설 저수지에 물을 대기 위해 주변의 지하수를 불법으로 빨아들이고, 수자원 부족을 고스란히 영세한 농가에서 부담하고 있다는 점이다. EU에서 농업의 규모가 가장 큰 프랑스에서 이런 촌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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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은 피고 지고주제 없는 글/印 2023. 4. 11. 03:13
올 봄에는 목련보다도 벚꽃이 더 빨리 폈다. 그래서인지 땅바닥에 어수선하게 떨어진 두꺼운 목련잎이 더욱 처연해 보인다. 자신을 채 내보이기도 전에 주위의 변화에 휩쓸려버린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이 탐스럽고 도타운 꽃잎은 다른 나무에서 떨어진 것들보다도 목직해 보이는 까닭에 이 세상의 중력을 더 많이 감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슷썬 생감자를 닮기도 한 새하얀 목련잎에서 향기와 함께 알싸한 냄새가 올라온다. 커다란 꽃잎이 빨아들인 봄의 피. 낙화함으로써 생채기가 난 것처럼 선혈 냄새같은 것이 올라온다. 이 한 송이 목련 잎은 가장자리부터 피딱지처럼 메말라감으로써 이제는 여름으로 아물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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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가을(Deutscher Herbst)일상/film 2023. 4. 10. 21:57
한 여자에게 인생을 저당잡힌 남자와 그 남자의 인생을 구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마리아라는 여자의 이야기. 영화가 끝난 뒤 시네토크가 따로 없었다면 단순한 치정극, 인생역정 스토리 정도로 이해했을 것 같다. 시네토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 영화의 역사적 맥락들이 각 장면마다 따라 붙기 시작한다. 일단 영화의 도입부에 아돌프 히틀러의 초상이 나타나는 것과 영화의 종반부에 헬무트 슈미트의 초상이 수미상관으로 나타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볼 수 있다.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 두 인물의 대비는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독일 영년(零年)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전후 폐허가 된 독일. 독일 역사의 시곗바늘은 원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아돌프 히틀러라는 광인의 출현은 독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