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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의 일기: 쿨레 베르트(Coulée verte)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25. 23:20
# 마지막 시험도 끝이 났다. 아직 페이퍼 과제가 하나 남아 있기 때문에 학기 일정이 모두 마무리된 건 아니지만, 촌각을 다투면서 해야 하는 공부는 이로써 끝이 났다. 시험은 총 다섯 개의 문제—게임이론, 협상 네트워크, ESS(Evolutionary Stable Strategy)—가 출제되었고, 막히는 문제 없이 내 기준에 만족스럽게 답안을 적었다. 남은 건 채점자의 몫이다. 이제 정말 끝이 났구나 하는 안도감, 그리고 약간의 성취감이 느껴진다. 사소하게나마 성취감을 느껴보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게 끝이 났구나, 못할 거라 생각했던 걸 해냈구나, 하는. 반 년에 불과하지만 꽤나 나이를 먹고 늦은 나이에 처음 외국생활을 하며 학업생활을 한다는 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도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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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의 일기: 삶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24. 18:04
"Le véritable voyage de découverte ne consiste pas à chercher de nouveaux paysages, mais à avoir de nouveaux yeux.", Marcel Proust # 얼마전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자신의 수필집에 썼었다는 문구를 하나 발견했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야를 갖는 것이다.” 뜬금없이 원효대사의 해골물 설화가 떠올랐다. 나는 항상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었지만, 새로운 것에 다다른 이후에도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 다시 빠지곤 했다. 결국 문제는 갈증의 대상에 있었던 게 아니라, 그 갈증의 원인에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결국은 내 앞에 무엇이 있는가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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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의 일기: 참을 인(忍) 세 번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24. 05:00
# 얼마전 파리에 체류중인 한국 학생들이 주택보조금 얘기하는 걸 듣고, 차마 다시 열어보고 싶지 않았던 사회보장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생각에 빠졌다. 파리에 도착한 날짜보다 출발할 날짜가 더 가까워진 지금 사회보장이 반드시 필요하진 않은데, 그 동안 들인 시간이 허송세월로 묻히는 게 싫어 절차를 끌고가는 상황이었다. 내 경우는 꽤나 복잡했다. 일단 소시에테 제네랄에서 은행 계좌를 트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게 결정적이었다. 때문에 덩달아 사회보장 신청이 크게 늦어졌다. 사회보장을 신청하려면 일단 은행계좌정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와 누굴 탓하겠냐마는 첫 단추를 소시에테 제네랄로 꿴 건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BNP 파리바나 소시에테 제네랄처럼 프랑스에서 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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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의 일기: 홀리(Holi)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22. 17:13
# 늦은 오후에는 불로뉴 숲 일대의 아클라마시옹 공원(Jardin d’acclamation)에 다녀왔다. 시험을 앞두고 해야 할 공부도 많고, 불로뉴 숲까지는 길도 멀어서 내키지 않았지만 며칠 전부터 N이 바람 쐬러 나가자고 연일 낚시질을 하던 터였다. 일요일이고 하루 종일 공부할 것도 아니다보니 바람도 쐴 겸 샹젤리제 거리나 좀 걷자고 했던 게, 아클라마시옹 공원에 가는 일정으로 불어나게 된 건, N이 이날 열리는 인도 축제 정보를 알고난 뒤의 일이었다. 나는 급작스런 일정 변경에 하던 작업만 마저 마친 뒤 3시 반에 약속장소에서 보자고 했다. 막상 1호선을 타고 역에 내리니 피로감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와서 이거 공원이나 잘 둘러보겠나 싶었다.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했는데 늦은 오후가 되어도 여전히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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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의 일기: 분실물 습득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21. 20:15
# 오전에 일찍 일어나 움직이기는 했는데 영 몸이 찌뿌둥하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정신을 차린 다음 잠시 기숙사에 들르려고 보니 주머니에 학생증이 잡히지 않았다. 학생증을 깜박하기도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기숙사를 출입하는 사생 덕에 들어오기는 들어왔는데, 문제는 방에 돌아와 방안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학생증이 보이지 않았다. 전날 센 강에서 N과 헤어진 뒤 기숙사를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학생증을 잘 썼으니까 어디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전날 늦은 밤 소르본 대학 앞에서 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기숙사에 들어가려다가 학생증이 보이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기숙사로 돌아온 시간상 자정이 넘어서 학생증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잠들었었다. 그러고서 전날의 기억은 온데간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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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해선 안 될일상/film 2022. 5. 21. 08:13
한동안 라 필모테크 뒤 캬흐티에 라탕에서 시리즈와 시리즈를 꽤 긴 기간 동안 상시 상영했다. 하루는 날을 잡아 를 보고 왔다. 이야기 전개가 단조롭고 청승맞은 느낌은 분명 있지만, 홍콩 느와르의 서막을 연 기념비적 작품이기도 하고 꼭 그런 영화사적 의미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양조위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나저나 일국양제가 막을 내리면서 이런 느낌의 홍콩영화가 더 나올 일이 없다는 게 아쉬운 일이다. 영화를 보고나서 이렇게 기분 나쁘고 본 게 후회된 영화는 가스파 노에의 이 처음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로 라 필모테크 뒤 캬흐티에 라탕에서 보았다. 영화의 구성상 엔딩 크레딧이 영화의 맨 앞에 나오고, 영화의 맨 마지막에 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듯한 메시지 '시간은 모든 걸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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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의 일기: 현실 속 풍경, 풍경 속 현실(au bord de la Seine)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20. 17:16
# 처음으로 성적이 발표된 과목이 나왔다. 사실은 요새 한국 귀국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교수에게 학점 확인을 미리 할 수 있을지 개인적으로 미리 문의를 해 놓은 과목이었다. 이곳에서 필요한 절차는 미리 밟기 시작해도 시간이 워낙 오래 걸리고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서두를 필요도 있었다. (서둘러도 아무 의미 없을 때가 많지만 일단 시도 자체는 해봐야 하니..) 어쨌든 연금정책은 13/20점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행여 10점(학점이수를 위한 최소 기준)을 넘기지 못하는 건가 하고 생각하고 있던 과목이라 한숨을 돌린 상황이다. 프랑스의 학점 제도는 우리나라와 상당히 다르다. A, B, C, D, F와 같이 알파벳으로 학점을 구분하지 않고, 20점 만점에 10점 이상의 점수를 획득해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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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의 일기: 일단 멈춤(Rappel)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i 2022. 5. 20. 02:00
# 오늘도 도서관과 수업장소를 오가는 일정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늘 마지막 문화인류학 수업을 듣고 조교와 짧게 얘기를 했다. 정확히는 마지막 과제에 대한 질문이다. 문화인류학 시간에 배웠던 협동이나 사회적 학습 같은 개념이 내 관심 분야 중 하나인 조직문화와 맞닿아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한 학기 내내 문화인류학 수업은 내게는 목에 걸린 생선가시 같은 것이었다. 모든 수업 시간표를 다 짜고도 더 이상의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았을 때 끝으로 넣었던 수업이 이 수업이었던 만큼, 망설이기도 많이 망설였고 배경지식이 없어 부담이 되었던 수업이다. 그럼에도 이 수업에 잔류했던 데에는 또 그간의 복잡한 행정문제가 얽혀 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한 학기 동안 이곳에는 물리학, 심리학, 신경과학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