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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9일의 일기: 정원(le jardin)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29. 18:13
# 낮의 길이가 빠르게 길어지는구나 실감하고 있었지만, 그저께부터 이곳에 서머타임이 적용되고 있는지는 몰랐다. 오늘은 비 예보가 있었던 날로 오후 두 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라고는 해도 억세게 쏟아지는 비는 아니어서 우산이 필요하지는 않다. 오늘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다. 화요일에 있던 오전 수업은 지난 주로 마무리가 되었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텅 비지만, 도서관에서 필요한 공부를 하기로 했다. 이미 마무리된 수업이 있다고는 해도 학기 초에 수업이 빽빽하게 몰려 있는 편이어서 시험 전까지 비는 시간에 부족한 공부를 해둘 필요가 있다. 오늘은 결정 이론을 공부하고 틈틈이 읽고 싶은 책을 읽었다. # 그렇다고 하루 종일 도서관에 머물렀던 건 아니다.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는 중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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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6일상/book 2022. 3. 28. 18:24
‘신발이란…… 발에 맞아야 하고…… 사람의 짝도 푼수에 맞아야 하는 법인데…… 훈장어른 말씀이 옳습니다. 옳다마다요. 야합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일 있을 수 없지요…… 서희 그 아이가 실리에 너무 눈이 어두워서…… 네에. 야합이 아닌 다음에야. 옳은 말씀이오. 옳다마다요.’ 함성 같은 것이 목구멍에서 꾸럭꾸럭 소리를 내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무서운 심연을 본 어제 충격이 가슴 바닥에서 아직 울렁거리고 있다. 두 어깨가 축 처지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 같았던 이동진의 얼굴이 크게 커다랗게 눈앞에서 확대되어 간다. 차츰 바닥에서 울렁거리고 있는 것은 실상 충격이기보다 두려움이다. 오싹오싹해지는 공포감이다. 도둑이 칼을 들고 덤비는 것보다 더한 무서움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미움도 사랑도 없는 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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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의 일기: 밤산책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28. 07:22
# 간밤에는 시네마테크 라탕에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를 봤다. 파리에 도착하고 나서 안착하기까지 행정 문제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이후로 행정을 맡는 곳들은 가급적 갈 일 자체를 없애고 있다), 영화를 좋아하고 예술을 좋아하는 나에게 파리만한 곳은 없다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 미술, 음악, 건축, 공연, 영화 어느 것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양질의 볼거리가 가득하다. 시간적으로도 중세에서부터 완전 최신 흐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범주의 예술 작품이 마치 도시 전체가 호흡하듯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파리가 예술의 도시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꼭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엄청 많다. 파리에 한 해를 머무른다 해도 파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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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의 일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émathèque française)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27. 20:02
# 일요일 기숙사는 시에스타에 빠진 것처럼 기분 좋게 조용하고 한적하다. 이 시간이면 항상 학생들로 붐비던 공용주방도 오늘만큼은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 아마도 많은 학생들은 봄바람과 햇볕을 찾아 바깥 어디로든 나갔을 것이다. 학교 현관을 출입하는 학생은 일요일에도 여전히 있지만, 나른한 봄기운이 공기를 가득 메우고 있어서 방안에 머무르던 사람도 설레게 만든다. 이따금 사람들이 내는 각양각색의 소음—문을 여닫는소리, 대화하는 소리, 자전거의 체인이 돌아가는 소리, 굽 높은 신발이 또각또각 지나가는 소리—이 따스한 공기를 투명하게 가로지른다. ‘정적(靜寂)’이 들릴 만큼 한가하고 평온한 한낮이다. # 파리에 있다보면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많다. 너무 많아서 시간을 쪼개 써도 모랄 정도. 여유 있게 시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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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의 일기: 총검과 피—삶과 죽음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26. 18:12
# 개인적으로 옷가게에 들락거리는 것만큼 피곤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파리 시내를 다니다보면 여기가 패션의 도시라는 걸 실감하고 이들의 패션—옷차림이든 가게든—을 관찰할 때가 있다. 지켜보다 보면 왜 여기서 성공한 옷들이 해외에서 상표를 달고 날게 돋힌 듯 팔리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하다. 이미 국내에 잘 알려진 브랜드들도 상당수 있겠지만, 일단은 브랜드가 너무나 다양하다. 이름 모를 개인 부티크들도 어떻게 마진을 남길까 싶을 정도로 자체적으로 고급스런 옷들을 진열해 놓는다. 사실 이렇게 옷을 만드는 곳들은 그냥 옷만 만드는 게 아니라, 옷과 어울리는 신발과 각종 악세사리까지 같이 구비해 놓는데 이걸 어떻게 가게 한 곳에서 해낼 수 있는지 원가 책정 방식이나 제작 과정이 궁금해질 정도다. 여하간 샹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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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의 일기: 마음(de cœur)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25. 17:25
# 파리에서 자전거를 타는 건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다. 처음에는 나 역시 파리가 자전거를 타기에 좋다고 생각했지만, 자전거를 타는 많은 사람들이 헬멧을 착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일단은 차량과 보행자, 자전거를 타는 사람 모두가 신호를 지키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공용자전거인 벨리브를 자주 이용하기 전까지는 파리가 서울만큼 차가 많지 않은 곳이다보니 신호등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그런가보다, 생각했었는데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다보니 서로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 건 불편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런 대로 리듬을 체득한 모양으로 요리조리 잘 빠져다닌다. 한 번은 자전거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오니 가방에 새똥이 눌러붙어 있었는데 어찌나 독한지 아무리 박박 닦아도 떨어지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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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의 일기: 마로니에(marronier)Vᵉ arrondissement de Paris/Mars 2022. 3. 25. 02:14
# 수업을 꽉꽉 채워서 들은 걸 빼면 한 게 별로 없는 하루다. 과욕을 부리지 않으려고 목요일에 청강하던 프랑스어 수업 두 개 중 하나만 선택/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오늘은 수업을 둘 모두 들어갔고 그 사이에는 문화인류학 수업을 들었다. 오전에는 어제 읽다만 논문의 나머지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해가 저물어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날씨도 퍽 좋아졌고 부쩍 잎이 올라온 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센 강변에서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계절이 다가온 것이다. 센 강변에서 시간을 보내려 약속을 잡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나는 어제 식물원 일대를 산책한 데 이어 오늘 점심에 잠시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한 게 소소한 위안이 되었다. # 지난 주말 에페흐네에서 랭스까지 트레킹을 한 여파가 한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