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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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프랑스 영화일상/film 2023. 1. 25. 00:32
올 연말연시는 프랑스 영화와 함께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이다. 영화의 배경은 파리 남동부 이브리 쉬르 센느(Ivry-sur-Seine)에 자리한 철거 직전의 시테 유니벡시테(Cité universitaire)라는 공동주택이다. 영화 도입부에도 자료화면을 통해 간략하게 소개되지만 이 영화는 실화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이 공동주택은 최초의 우주사인 유리 가가린에 의해 1963년 준공된, 이 지역(Val-de-Marne)에서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그러던 것이 반 세기를 넘기면서 안전상 문제로 인해 2019년 철거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때문에 영화는 시테 유니벡시테에 대한 오마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는 폭발 직전의 건물 안을 무중력으로 유영한다는 판타지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고, 벙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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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없는 삶일상/film 2022. 12. 28. 18:19
온풍기 앞에서 노곤노곤 꾸벅꾸벅 졸면서 관람한 영화라 리뷰다운 리뷰를 남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어쩐지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레오(Léo)라는 꼬마는 스스로를 레올로(Léolo)라고 명명한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을 둘러싼 병적인 여건을 통과할 수 있는 해방구를 찾아나간다. 레오 가족의 병적인 모습들은 레오로 하여금 어린 아이다운 발랄한 상상력을 자극하기보다는 어두침침한 은신처로써의 뒤틀린 환상을 부추긴다. 변기 위에 올라앉아 '밀어 내(Pousse)!'라며 고함치는 레오의 엄마, 레오가 익사 직전에 이르기까지 그의 머리를 물에 처박는 할아버지, 동네 깡패에게 겁박을 당한 뒤 근육을 키우는 데 강박을 가지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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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and Let Die일상/film 2022. 12. 12. 16:05
오랜만에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을 보고 왔다. 이후 그의 두 번째 로맨스 영화다. 두 작품 모두 폴 토마스 앤더슨 특유의 코믹적 요소와 독특하고 기발한 구성이 눈에 띤다. 다만 의 주인공들의 나이가 더 어리고—극중 개리는 15살로 25살 알라나를 꼬시는 것으로 나온다—영화의 배경도 1970년대 캘리포니아여서인지 영화가 전반적으로 더 풋풋하고 아련한 느낌이 있다. '개리' 역을 맡은 쿠퍼 호프먼은 필립 시모어 호프먼의 아들로 를 통해 데뷔했다는 걸 관람한 후에야 알았는데, 뒤늦게 그의 이목구비와 다부진 말투에서 필립 시모어 호프먼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편 영화에서는 '리코리쉬 피자'의 뜻을 추론할 만한 단서가 나오지 않는다. '리코리쉬 피자'는 70년대 남캘리포니아에 실재하던 레코드샵을 가리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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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찰나, 허영과 본질일상/film 2022. 12. 8. 22:15
피노키오. 참 익숙하고 정겹기까지 한 캐릭터의 이름이다. 이름만 들었을 땐 디즈니 사에서 만든 고깔 모자의 피노키오가 먼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캐릭터 상품으로만 접했을 뿐 정작 피노키오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敍事)로 접해본 적은 없었고, 게다가 그런 이야기를 기예르모 델 토로가 애니메이션화했다고 하기에 망설임 없이 이 작품을 보게 되었다. 일단은 영화의 배경이 무솔리니 통치 하의 이탈리아여서 동심을 자극하는 이 나무 캐릭터가 사실은 시대상을 반영한 결과물인가 싶지만, 좀 더 정보를 찾아보니 피노키오라는 작품은 피렌체 출신의 작가 카를로 콜로디에 의해 1883년에 처음 발표되었다고 하니, 기예르모 델 토로가 차용한 시대적 서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 피노키오가 요정으로부터 영혼을 얻을 때 처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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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일상/film 2022. 11. 24. 23:23
근래에 '가족'을 주제로 한 아주 좋은 영화 두 편을 봤다. 그 첫 번째 영화가 이다. 150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 다채로운 화면들과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아주 꽉꽉 담겨 있어서 뇌에 과부하가 걸릴 만큼(?) 보는 재미가 있다. 영화는 에블린이라는 주인공이 선택하는 또는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녀의 선택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걷는 인생의 경로는 하나의 통계적 가능성에 다른 통계적 가능성이 겹쳐지면서 윤곽을 잡아간다. 가능성의 망(net) 위에서 다음 노드(node)로 넘어가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선택되지 않은 세계는 미지의 가능성으로 남는다. "You Are Not Unlovable. There Is Always Something 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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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변해가네일상/film 2022. 11. 16. 21:29
기나긴 영화 가뭄(?)의 시간이 지나고 최근에 몇 편의 영화를 관람했다. 반드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영화는 아니지만 요 근래 뜨거워진(..?) 두뇌도 식힐 겸 모처럼 영화관을 찾았다. 은 사실 제목과 포스터만 봐서는 다정다감한 가족 드라마를 기대했다. 물론 가족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는데, 카탈루냐 지방에서 농토를 잃을 위기에 처한 한 가족의 이야기다. 거칠게 말해서 지주-소작농 문제가 다뤄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이런 문제가 아직까지 현대 사회에 남아있다고(?!)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토지 소유자의 일방적 통보에 따라 키메트 일가가 일구는 복숭아 농사는 올해가 끝이다. 올 여름을 넘기고 나면 복숭아 나무는 밀릴 것이고 그 자리에 태양광 패널이 빼곡하게 들어설 예정이다. 키메트 가족은 몇 대에 걸쳐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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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폴린일상/film 2022. 10. 20. 16:48
Qui trop parole, il se méfait. Chrétien de Troyes, Perceval 최근 에릭 로메르의 작품들이 재개봉했길래, 무턱대고 이라는 작품을 보고 왔다. 1983년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봐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 말 많고 탈 많은 로맨스 영화로, ‘말이 많은 자, 화를 자초한다(Qui trop parole, il se méfait)’는 12세기 프랑스 시인의 문구와 함께 시작한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가 늘 그러하듯 촌철살인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술술 발설하는 배우들과, 도입부의 글귀대로 말로 인해 손해를 보는 등장인물들의 얽히고설킨 로맨스가 펼쳐진다. 영화의 제목에 등장하는 폴린은 15세 소녀로 영화에서는 대개 조용한 관찰자처럼 나타난다. 사촌언니 마리옹과 함께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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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side Down일상/film 2022. 8. 26. 18:11
영화 포스팅을 쓰기는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실제로 이번 여름 내내 영화를 거의 안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직후에 봤던 영화인데 이제서야 글을 남긴다. 스크린 X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고 아이맥스로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두 번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은 아직도 예매순위 상위에 랭크되어 있어서, 이렇게 롱런하는 영화를 보기도 오랜만이다. 전개가 불보듯 뻔하게 예상됨에도 흠잡을 게 없는 영화다. 고전적인 스토리를 이렇게 볼 만하게 만들어내는 것도 재주다. 물론 여기에는 뛰어난 연출과 각본도 있겠지만, 이걸 화면 안에서 잘 구현해주는 배우들의 몫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톰 크루즈라는 우리의 명배우는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120% 소화해낸다. 보는 내내 통쾌하고 시..